2009년 03월 25일
평균 초혼 연령.
# by | 2009/03/25 14:35 | 일상 | 트랙백 | 덧글(0)
# by | 2009/03/09 10:07 | 일상 | 트랙백 | 덧글(1)
# by | 2009/03/04 13:26 | music | 트랙백 | 덧글(0)
# by | 2009/02/26 09:58 | 일상 | 트랙백 | 덧글(0)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남기고 간 업적과 그들의 연주 스타일을 정리한다는 것은 실로 방대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선 20세기 초에 영향을 미친 바이올린 악파들을 중심으로 얘기를 시작한다.
물론 오늘날 바이올린의 계보나 악파를 논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20세기 초까지는 위대한 바이올린의 스승을 중심으로 한 바이올린 악파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으며, 그 이후에도 몇몇 악파들의 특성들은 바이올린 주법의 주요 원천이 되고 있으므로, 20세기 바이올린계의 흐름을 악파별로 조명하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바이올린 악파는 대개 프랑코-벨기에 악파, 독일 악파, 이탈리아 악파, 러시아 악파, 그리고 체코와 그밖의 동구권으로 나누지만, 독일 악파와 이탈리아 악파는 보수적인 성향으로 일찍 쇠퇴했으므로 프랑코-벨기에, 러시아, 그리고 체코 및 동구권 악파들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위대한 스승들 가운데 20세기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로는 랑베르 마사르가 있다. 마사르는 기질적으로 심약한 사람이었지만, 스승으로서는 아주 훌륭해 크라이슬러, 비에니아프스키, 사라사테, 마르시크 등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를 길러냈다. 마사르의 제자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지속적인 비브라토를 구사해 우아하고 달콤한 음색을 만들어낸 현대적인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마사르의 다른 제자인 마르시크는 20세기 초반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칼 플레쉬, 자크 티보, 조르주 에네스쿠 등을 길러낸 위대한 스승으로 이름을 남겼다. 마르시크의 제자 칼 플레쉬는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바이올린 주법을 가장 충실히 계승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바이올린 주법의 과학적인 연구자로, 바이올린 테크닉에 대한 책을 발간해 바이올린 기술의 총체적인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다루었고, 매우 합리적으로 기술적인 훈련을 하는 방법을 제시해 가장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바이올린 주법을 확립시켰다고 평가된다.
프랑코-벨기에 악파 중에서도 벨기에 쪽의 중심 인물로 꼽을 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는 외젠느 이자이다. 그는 밀도있는 비브라토를 구사했고, 여러 가지 변칙적인 주법을 고안해내 자신만의 독특한 연주법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벨기에에 이자이가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자크 티보가 있었다. 티보의 연주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는 바로 ‘우아함’일 것이다. 그의 톤은 별로 크지는 않았지만 부드럽고 정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 악파는 비교적 늦게 형성되었지만 20세기 바이올린 연주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레오폴드 아우어는 러시아 악파의 시조로 야샤 하이페츠, 토샤 샤이델, 에디 브라운, 막스 로젠, 미샤 엘만, 나탄 밀슈타인, 예프렘 짐발리스트, 텔마 기븐 등의 쟁쟁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을 길러낸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는 러시안 보우 그립, 즉 오른손의 집게손가락을 좀더 감싸쥐어서 활을 현에 더 밀착시켜 소리낼 수 있게 하는 특수한 방법을 개발해 러시아 악파만의 탄력있고 긴장된 음색을 만들어냈다. 하이페츠는 이러한 아우어의 주법을 충실히 계승해 활의 압력에 치중하는 보잉과 그 특유의 강렬한 비브라토, 그리고 완벽하고 화려한 테크닉으로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고 수준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었다. 하이페츠와는 대조적으로, 밀슈타인은 단정하고 지적인 연주 스타일을 고집했으며, 엘만은 긴장감있는 임펄스 비브라토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관능적인 음색을 만들어냈다. 짐발리스트는 하이페츠의 기술적 완벽성과 엘만의 뛰어난 톤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내면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체코와 그밖의 동구권에서도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것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교육자였던 오타카 세프치크의 체계적인 테크닉 훈련법에 힘입은 바 크다. 세프치크의 교수법은 손과 활의 민첩성을 기르기 위해 단계적인 훈련을 유도하는 것으로, 이 훈련법을 계승한 세프치크의 제자 얀 쿠벨릭은 ‘파가니니의 재래’라 불릴 정도로 기술적 완벽성을 지닌 바이올리니스트였으나 세프치크의 기계적인 훈련법을 과도하게 사용함으로써 윤기없는 연주를 들려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20년대 중반은 크라이슬러, 엘만, 하이페츠로 대표되는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에 신동 예후디 메뉴인은 10대의 나이에 이미 믿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연주로 음악계를 경악시키면서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선두주자로 부각되고 있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어떤 특정 악파에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연주 스타일을 고집하는 바이올리니스트들로 폴란드계 유태인인 브로니슬라브 후베르만과 헝가리 태생의 요제프 시게티가 활발한 연주 활동을 전개했다.
이 무렵 러시아에서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라는 20세기 최대의 비르투오소가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의 또 다른 악파의 위대한 스승 표트르 스톨리알스키의 제자로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특징을 두루 갖춘 쉬프팅 방법과 아우어식의 보잉, 연주 자세로 따뜻하면서도 강렬한 음색을 만들어냈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역시 러시아 출신의 레오니드 코간은 선배격인 오이스트라흐와는 상반된 경향을 보여 비브라토를 억제한 견고한 톤으로 반낭만적이고 금욕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계승자로 여겨지는 아르투르 그뤼미오는 ‘티보의 재래’라는 평가를 받는 벨기에 출신 바이올리니스트로 모차르트의 연주에 특히 뛰어나다. 프랑스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로는 남성적인 톤과 놀라운 음악성을 지닌 지네트 느뵈가 있으며, 그밖에도 관능적인 음색과 우아함을 겸비한 지노 프란체스카티가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바이올린 연주 기술에 있어서 상당히 보수적이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신중한 음악적 접근 태도에 기인한다. 이러한 독일 전통의 계승자로서 아돌프 부쉬, 게오르크 쿨렌캄프, 볼프강 슈나이더한, 시몬 골드베르크가 있다. 그러나 세프치크의 제자였던 오스트리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에리카 모리니는 당대 연주가들과는 다른 독특하고 개성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 시기에는 체코 및 동구권에서 특히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이 탄생했다. 체코 악파의 정통 계승자로 여겨지는 요제프 수크는 실내악 연주로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으며, 폴란드 출신의 헨릭 셰링은 바흐 연주의 정통파 해석으로 명성을 쌓았다. 요즈음 다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이다 헨델은 폴란드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느뵈와 함께 플레쉬의 제자였다. 그는 레코딩을 기피하는 연주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나 최근 73세의 나이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의 음반을 내놓기도 했다. 그의 음색은 그다지 풍부하지는 않지만 따뜻하면서도 강인하고 표현력이 넘친다.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실내악에 능했고, 지휘자이기도 했던 샨도르 베그와, 여류 바이올리니스트 요한나 마르치가 있다. 그밖에도 루마니아 출신의 롤라 보베스코는 6세 때 최초의 리사이틀을 열고, 12세에 파리음악원을 수석 졸업한 천재 소녀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밖에도 스위스의 한스하인츠 슈네베르거, 이탈리아의 조콘다 데비토, 그리고 달콤한 음색을 지닌 알프레드 캄폴리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20세기 후반의 바이올린계는 이반 갈라미언의 제자들이 독점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러시아 전통을 계승한 20세기의 위대한 스승 이반 갈라미언은 러시아파와 프랑스파의 장점들을 흡수해 매우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주법 체계를 만들어냈으며, 고정된 원칙을 내세우기보다는 연주자 개인의 특수성을 살려 개발하는 교수법으로 유명했다. 그의 교수법은 실로 혁명적이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많은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탄생했다. 그들 중 선두주자는 역시 유태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차크 펄만일 것이다. 그는 소아마비로 다리가 부자유스럽지만 놀랄 만큼 유려한 음색과 완벽한 테크닉을 보여주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비르투오소이다. 그와 더불어 갈라미언의 제자로 정경화, 김영욱, 강동석, 핀커스 주커만, 제이미 라레도, 그리고 재능이 뛰어났으나 아깝게 요절한 마이클 레빈 등이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특히 유태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두드러지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 이유 중 하나로 핀커스 주커만과 슐로모 민츠 등의 인재들을 발굴해낸 아이작 스턴의 영향력이 많이 작용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스턴은 우크라이나의 유태인 지구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한 대표적인 유태계 바이올리니스트로 그의 연주 스타일은 정확하고 형식적인 균형미를 이루고 있다. 그밖에 뛰어난 유태계 바이올리니스트로는 빛나는 테크닉과 날카로운 감성의 소유자로 20세기 음악에 뛰어났던 이브리 기틀리스가 있다.
이 시기에 들어와서는 고음악을 원래 악기로 연주하는 원전 연주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들도 점차 늘어났다. 바로크 바이올린의 명수 쿠이켄 3형제 중 둘째인 지기스발트 쿠이켄은 대표적인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독학으로 바이올린을 공부하고 레코드에서 훌륭한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루마니아 태생 유태인이며, 갈라미언과 막스 로스탈의 제자인 세르지우 루카는 고악기와 현대 악기를 두루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밖에 네덜란드 출신의 얍 슈뢰더, 루시 반 달, 그리고 독일의 베르너 크로칭거, 오스트리아의 알리스 아르농쿠르, 영국의 모니카 허젯, 앤드류 맨즈, 이탈리아의 파비오 비온디 등의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있다.
전반적으로 20세기 후반은 유태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강세를 보였으나, 러시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 중 뛰어난 테크닉과 독특한 음악 해석으로 많은 음악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기돈 크레머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제자인 크레머는 다채로운 음향과 미묘한 음영을 주는 섬세한 주법으로 현대 바이올린 주법을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밖에도 러시아에는 이고르 오이스트라흐, 타티아나 그린덴코, 올레그 카간, 보리스 벨킨, 드미트리 시트코베츠키 등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20세기 후반, 유럽은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꾸준히 좋은 연주자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우선 프랑스 출신 바이올리니스트로는 피에르 아모얄과 장 자크 캉토로프, 그리고 크리스티앙 페라스, 오귀스탱 뒤메이 등이 세련된 연주를 들려준다. 그밖에 이탈리아에는 파가니니에 비교되는 빛나는 테크니션 살바토레 아카르도와 우토 우기, 펠릭스 아요, 독일에는 비올라 연주자이기도 한 토마스 체트마이어가 있다.
20세기의 황혼에 접어든 이 시점에서 21세기를 밝혀줄 바이올린의 거장들은 과연 누구일까? 우선 카라얀의 눈에 띄어 급격히 성장했던 안네 소피 무터가 있을 것이다. 이미 왕성한 연주 활동을 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무터는 특유의 탄력있는 리듬과 긴장감 있는 음색에 점차 음악적 풍부함을 더하고 있어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다. 무터와 함께 게르만계 바이올리니스트의 맥을 잇고 있는 프랑크 페터 침머만은 밝고 따뜻하며 섬세한 음색과 신중함을 갖춘 성실한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러시아에도 21세기를 이끌어갈 젊고 재능있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있다. 무터와 함께 20세기 말을 대표하는 여류 바이올리니스트 빅토리아 뮬로바는 나무랄 데 없는 테크닉을 보여주며, 차세대의 대표 주자 막심 벤게로프와 바딤 레핀은 왕성한 연주 활동과 레코딩을 통해 대담하고 독특한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미국 출신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로는 조슈아 벨과 길 샤함이 돋보이며, 동양계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일본의 미도리와 우리나라의 장영주가 21세기를 이끌어갈 젊은 거장들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글/ 최은규(부천 필 단원, 바이올린)
월간 객석 1998년 6월(제172 호)
출처>> http://blog.naver.com/bananaisnana.do?Redirect=Log&logNo=1847355
http://jnjmuse.cnei.or.kr/violine11.htm
# by | 2009/02/23 10:32 | music | 트랙백 | 덧글(0)
설명1
1770년 12월 17일, 베토벤이 본에서 태어났을 때는 이미 신동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의 명성이 전 유럽에서 걸쳐 퍼져있을 때이었다. 이러한 신동에 대한 동경을 가진 베토벤의 아버지(Johann van Beethoven, 1740-1792)는 본의 궁정악단의 테너가수로 있으면서 베토벤을 음악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1779년 10월부터 베토벤은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평균율 악보를 가지고 있던 궁정악단의 오르간주자인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로부터 음악적인 기초지식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본에 계속 거주하며 모차르트에게 배우기 위하여 잠깐씩 빈을 방문하였으며, 모차르트가 죽은 이듬해(1792)에 하이든(Joseph Haydn, 1731-1809)에게 작곡을 배우기 위하여 빈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하이든에게서 그렇게 많은 것을 배우지는 못하였다. 이렇게 하여 음악사적으로 베토벤 음악의 초기시대라고 구분되어지는 비엔나시대(1802년경까지)가 시작된다. 이때에 베토벤은 그의 음악에서 전통을 따르고 있었으며, 균형적인 멜로디의 구성을 추구하고 완숙한 악곡 구조를 가진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초기의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삼중주곡, 현악 사중주곡 그리고 교향곡 1번과 2번 등이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청각장애로 인한 자살결심을 했던 1802년부터 1814년경까지를 그의 작품세계에서 중기로 보는데, 이 시기에 그의 음악은 음악외적인 내용을 증가시켜 새로운 구조와 형식에 이르고 있다. 베토벤은 이 시기에 자신의 음악을 고전적 형식으로부터 탈피시키려 하였으며 더욱 자유로운 주제의 취급과 선율이나 화성에 있어서의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관현악법에 있어서의 변화 등도 추구하였다. 교향곡 3번 『영웅』이나 5번 『운명』, 6번 『전원』과 바이올린 협주곡이 작곡되었으며, 피아노 협주곡 5번 일명 『황제』도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베토벤의 음악에서 후기시대는 1814/15년부터 1827년 3월 26일 그가 비엔나에서 사망할 때까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특히 1819년 청각을 완전히 상실한 후 그는 자신의 영감에만 의존하여 창작하였는데, 이상적인 인간성을 위한 발언을 하고 시적인 내용과 섬세한 구조, 집중력 등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차호성]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플랑드르(오늘날의 벨기에 지역)의 뤼티히와 메헬른 사람들이었다. 그는 베토벤과 똑같이 루드비히라 불렸다. 그는 뢰벤과 뤼티히의 합창단원으로 일했고 1733년 독일의 본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1771년 이후 선제후의 카펠마이스터로 일했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요한은 할아버지가 일하던 악대의 테너 가수로 일했다. 베토벤은 일곱 자녀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일곱 중 세 명은 일찍 죽었고, 베토벤은 남은 형제들 가운데 장남 노릇을 해야 했다. 베토벤은 일찍부터 음악성을 보였는데, 이것이 아버지로 하여금 대단한 욕심을 품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을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으로 키우고 싶어했다. 그는 어린 베토벤에게 열심히 쳄발로를 연습하도록 강요하였다. 어린 베토벤의 주요 선생으로는 궁정 오르가니스트였던 에덴(Gilles van den Eeden)이 있었다. 물론 주위의 친지 음악가들도 베토벤을 가르쳤다. 그 덕에 베토벤은 6세 때에 처음으로 청중들 앞에서 공개 연주를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베토벤의 나이를 두 살이나 줄여 사람들에게 알릴 정도로 신동 모차르트를 의식했다. "신동 베토벤"을 시도한 행사는 무참히도 실패했다. 강요된 연습은 연주 실력을 대단하게 만들지 못했다. 1781년부터는 궁정의 다른 오르가니스트였던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에게 쳄발로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 사람은 베토벤의 연주 기량을 크게 발전시켰을 분만 아니라 친구처럼 지냈고 베토벤의 앞날을 위해 동분서주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베토벤이 베토벤이 된 것은 "신동 베토벤"을 기획한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이 네페였다. 베토벤은 그 다음 해에 궁정의 보조 반주자로 일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네페는 베토벤에게 바하의 {평균율}과 칼 필립 에마누엘 바하의 쳄발로 곡들을 가르쳤다. 베토벤은 또한 루케지(Andrea Lucchesi)를 악장으로 하는 궁정 악대에서 당대의, 여러 가지 음악을 섭렵했다. 1783년 베토벤의 정상적인 음악교육은 끝나고, 그는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계속하게 된다. 네페는 베토벤에게 궁정의원이었던 브로이닝(Helene von Breuning) 여사를 소개했는데, 이것이 사회적으로 베토벤의 앞길을 열어 주는 여러 가지 인간관계의 출발점이 되었다. 베토벤은 브로이닝 집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집으로부터 환영을 받는 손님이기도 하였다. 브로이닝을 통해 베토벤은 바이올리스트 리스(Franz Anton Ries)를 알게 되어 바이올린을 배우게 된다. 그 대신 베토벤은 그의 아들 페르디난드(Ferdinand)에게 음악을 가르친다. 또한 그는 발트슈타인(Ferdinand Ernst von Waldstein) 백작을 알게 된다. 발트슈타인은 네페와 함께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를 움직여 베토벤을 비엔나로 보내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그들은 베토벤이 모차르트에게서 배울 수 있기를 바랐다. 1787년 비엔나로 간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만난다. 하지만 베토벤의 어머니가 위독한 상태라서 후일을 기약하고 다시 본으로 되돌아온다. 그는 본에 돌아와 스스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하는 하는 새로운 임무에 직면했다. 그의 아버지는 "신동 베토벤" 기획이 좌절된 후 술에 빠져서 가정을 추스를 수 없는 형편이었다. 베토벤은 다시 본에서 궁정 오케스트라, 교회, 아카데미의 일을 하며, 작곡도 한다. 그가 본에서 쓴 작품들은 많다고는 할 수 없다. 1792년 이미 국제적인 인물로서 잠깐 본에 들른 하이든에게 소개된다. 이 때에 하이든은 비엔나에서 베토벤에게 작곡을 가르쳐 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베토벤은 -발트슈타인의 주선으로- 다시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의 재정 지원을 받아 다시 비엔나로 가게 된다. 이 때 베토벤은 비엔나에서 공부한 후에 다시 본에 돌아와 음악가로서 일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하지만 이런 계획은 후에 프랑스 군대의 라인 지역 점령과 그로 인한 선제후의 폐위로 인해 무산되고 만다). 하이든에게서 작곡 공부를 시작한 베토벤은 스승의 가르침에 대해 별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틀에 갇힌 것처럼 보이는 하이든의 가르침에 대해 내적으로 저항했다. 그 대신 그는 하이든 모르게 쉥크(Johann Schenk)에게 가서 배운다. 하이든이 2차로 런던을 여행할 때에 베토벤은 알브레흐츠베르거(Albrechtsberger)에게 대위법을 배운다. 하지만 그는 엄격한 대위법의 규칙들에 대해 못마땅해 했다. 또한 그는 살리에리(Atonio Salieri)에게서 이태리 성악 작곡 방식을 배웠다. 푀르스터(Emanuel Aloys Förster)에게서는 실내악 형식을 배운다. 이러한 음악공부는 베토벤의 음악을 더욱 다양하고 성숙하게 한다.
베토벤의 비엔나 생활은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의 재정적 지원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1794년 프랑스 군대에 의해 쾰른의 선제후 제도가 없어지면서 그의 지원은 끊기고 만다. 비엔나는 각 궁정에 오케스트라가 있어서 음악가로서 활약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그는 작곡과 연주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다. 그는 비엔나에서 새로운 후원자들을 확보한다. 리히노브스키(Lichnowvsky) 공과 에르되디(Erdödy) 백작 같은 귀족들의 집에서 거하면서 그들 가족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러시아 대사 라주모브스키(Rasumowsky)백작, 에스테르하지(Esterhazy)공, 루돌프(Rudolf) 대공 등 당대의 귀족들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이 귀족들과 일반 시민들은 베토벤에게 수많은 작곡 주문을 통해 그가 음악가로서만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베토벤은 분주한 음악가 생활을 비엔나에서 보낸다. 열정적인 음악활동을 통해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미래는 무지개빛처럼 보였다. 그의 후원자들(루돌프, 로브코비츠, 킨스키)은 그를 위한 재정 부담을 약속했고(1년에 4000굴덴의 종신연금), 악보출판사는 높은 작곡료를 지불했다. 그는 원하는 곳에서 음악회를 열 수 있었고, 그가 음악을 가르칠 마음이 생길 때면 많은 상류층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 왔다. 그는 그 이전의 음악가들이 겪어야 했던 재정적 곤란을 거의 몰랐다. 그를 일컬어 최초의 자유로운 작곡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1796년 그의 귀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다. 1802년 그는 비엔나 근교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쉬면서 그 유명한 유서를 쓴다. 그 내용은 절망 가운데서 동생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는 절망적인 기분에 잠겨 살면서 주위 사람들과 자주 다투었고, 그의 가장 친한 후원자들도 그를 멀리하게 된다. 1808년에는 음악회를 전혀 열 수 없을 정도가 된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음악사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연서인 {불멸의 연인에게}(An die unsterbliche Geliebte)라는 편지를 1812년에 쓴다. 이 편지의 수신자가 누구였는지는 호사가들의 엄청난 관심거리였다. 하지만 아직도 명확하게 누구를 향한 편지인지 알 수 없다. 한때 요세피네 폰 브룬스빅(Josephine von Brunsvik)을 위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등장했으나, 그녀에게 보내진 베토벤의 편지가 발견되면서 이 설은 시들해지고 말았다. 1810년대에 그의 명성은 최고조에 달한다. 그는 밀려드는 작곡 주문에 다 응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해인 1815년에는 분위기가 반전한다. 그의 후원자들은 죽거나 비엔나를 떠났고, 음악계는 롯시니 열풍에 빠진다. 1819년 그는 완전한 귀머거리가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작곡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1825년 그는 병마와 싸우다가 2년 후인 1827년 세상을 떠난다. 그의 죽음에 대해 온 유럽의 지식층은 애도를 표했다. 20000명의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례했다. 시인 그릴파르쳐는 그를 위해 조사를 낭독했다. 횃불을 들고 행진하던 젊은이 가운데는 슈베르트도 있었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세 시기로 나뉜다:
①초기 비엔나 시대, 1802년경까지.
비엔나의 전통을 따르는, 주로 하이든 식의 작품들을 작곡한다. 교향곡 1번, 2번, 피아노 소나타 작품 2, 7, 10, 13(비창), 14, 22. 베토벤은 스승으로서의 하이든에게는 별로 만족하지 못했으나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하이든으로부터 형식적인 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②중기, 1802-12/14
이 시기는 베토벤의 창작의욕이 가장 왕성할 때이다. 그는 밀려드는 주문을 다 받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주문을 받았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들은 다른 시기의 것들보다는 더 많이 연주된다. 교향곡 3번-8번. 피아노 소나타 작품26, 27, 28, 31, 49, 53(발트슈타인), 54, 57(열정), 78, 79, 81a(고별), 90. 32피아노 변주곡(WoO. 80)피아노 협주곡 3번-5번. 현악사중주 작품59, 74, 95. 삼중주 작품70, 97. 첼로 소나타 작품 69. 바이올린 소나타 작품 90. 합창 판타지(작품 80). C장조 미사(작품86). 에그몬트 서곡.
③후기, 1820년대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들을 수 없을 때에 작곡한 것들이다. 피아노 소나타와 현악사중주들은 한 때 귀머거리 베토벤의 작품으로 정상을 벗어난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오늘날은 베토벤의 작품들 중 가장 심각하고 진지한 음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교향곡 9번. 피아노 소나타 작품101, 106, 109, 110, 111. 장엄미사(작품 124). 현악사중주 작품 127, 130, 131, 132, 135.
○베토벤의 테마 모티브 가공 기법:
베토벤은 아주 작은 구조의 모티브를 선호했다. 이 모티브는 연속적으로 이어져 나와 주로 음악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작은 모티브들은 더 큰 테마의 일부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작은 모티브가 테마의 균형감각을 잠시 잊게 하고 계속적인 "추구"와 "돌진"의 회오리로 향하게 한다. 이 모티브는 잠시 휴식도 하고, 길게 늘려지기도 하고, 축소도 되고, 다른 테마 모티브 음형들에 의해 잠시 가려지기도 하지만, 곧 다시 새로운 힘을 가지고 나타난다. 특히 그의 모티브들에서 많이 보는 치는 박을 비우는 경하양은 셈하는 박을 강하게 의식해야 정확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엇갈린 박(싱코페이션)의 모티브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모티브들은 셈하는 박과 함께 고안된 것들이다.
○심포니
베토벤 심포니 1번(1799)과 2번(1802)은 그의 초기에 속하는 곡으로 하이든적인 차분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심포니는 3번(1803, {영웅})에서부터 본격적인 "베토벤적" 특징들을 드러낸다. 끈질긴 테마 모티브 작업을 통하여 극적이고 긴장이 넘치는 거대한 음악을 형성하는 것, 극적인 성격이 강한 전개부에 비중이 오는 것(제시부 150마디, 전개부 250마디)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긴장을 불러오는 효과는 모티브의 리듬적 특징과 그 변형을 통해 이루어진다.
테마 모티브 작업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 5번 심포니(1807)이다. 이 작품의 1악장은 짧고 강력한 <4음 모티브>를 통해 음악사에서 보기 드문 긴박감 있는 음악적 과정을 보여준다. 5번의 마지막 악장은 행진곡적 C장조로 음악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면서 끝난다.
-4, 7, 8번은 1, 2번과 마찬가지로 기악의 형식적 측면을 따르는 절대음악 작품이다.
-6번 심포니({전원})는 프로그램 음악이다. 전원적 F장조의 테마가 울리다가 새소리, 폭풍우 소리 등이 울린다.
-9번({환희})은 심포니와 오라토리오를 합성시킨 곡. 마지막 악장에 성악(독창들, 합창)이 온다. 대위법의 사용이 다른 심포니들에서 보다 많이 증가했다.
○피아노 소나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개는 오늘날 연주장의 핵심 레퍼토리에 속한다. 그의 피아노 작품 역시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뉠 수 있다. 소나타악장 형식이 올 곳에 변주곡, 판타지, 푸가 등이 사용되기도 했다.
-초기: 작품 2의 1 가량은 표면적으로 하이든과 아주 유사하지만, 모티브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극적인 성격을 형성시키는 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 13번({비창})은 어둡고 "무겁게"(Grave) 시작하는 느린 첫머리를 통해 감정과다적이고, 주관적인 성향을 표출한다.
-중기: 이 시기는 작품 26부터 시작된다. 첫 악장에서 소나타악장 형식을 쓰지 않고 변주곡을 사용했다. 느린 악장에서 유명한 장송행진곡이 나온다. 작품 27, 1-2번(E 장조, C 단조 {월광})은 "거의 판타지처럼"(Quasi una fantasia)이라는 부제목을 달고 있다. 고전적 형식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판타지 형식을 쓰게 했다. 작품 31의 2번({템페스트}) 1악장은 끊임없는 모티브 가공 작업을 보여주지만, 레치타티보에 흡사한 테마는 고전적인 소나타악장 형식과는 다른 음악을 만들게 한다. 작품57({열정})은 제1테마 자체가 두가지 상반되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유니즌/화음, 하강/상승, pp/ff). 이 "갑작스러운" 성격의 테마 뒤에 부드러운 제2테마가 따라온다.
-작품101(1816) 이후의 5 작품들은 후기의 것에 속한다. 모두가 폴리포니적 요소를 사용한다.
○현악사중주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들도 그의 작품 시기구분에 따른 초기, 중기, 후기의 흐름을 같이 보여주고 있다. 중기의 것들은 베토벤적이면서도 대중적이다. 그런데 후기 현악사중주는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 작품127(1822-25), 132(1824-25), 130(1825-26), 131(1825-26), 135(1826). 후기 현악사중주들의 중심적 기법은 푸가이다. 푸가의 한 테마로부터 다른 여러 테마들이 발생하며, 이를 소나타악장의 극적인 성격과 결합시킨다. 또한 후기 소나타들은 당시의 생각으로는 지나치게 불협화음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작품132 a단조 아다지오 악장에는 "치유받은 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감사찬송, 리디아 선법"이라는 말이, 작품135 종악장의 중심 테마에 "꼭 그래야 하나?"(Muss es sein), "꼭 그래야 해!"(Es mu sein!)라는 말이 선율에 맞추어져 붙어 있다. 이는 베토벤에게서 흔히 보는 비음악적인 내용을 넣어보려는 시도로 보인다. [홍정수]
출처> http://hishkim.com.ne.kr/l/comp/beethoven.htm
# by | 2009/02/23 10:11 | music | 트랙백 | 덧글(0)


# by | 2009/02/20 10:39 | major | 트랙백 | 덧글(0)
http://www.youtube.com/watch?v=XHosLhPEN3k&feature=related
Original: "Let It Be" (Beatles)
Write in C
When I find my code in tons of touble,
Friends and colleages come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Write in C."
As the deadline fast approaches,
And bugs are all that I can see,
Somewhere, someone whispers:
"Write in C."
Write in C, write in C,
Write in C, oh, write in C.
LISP is dead and buried,
Write in C.
I used to write a lot of FORTRAN,
For science it worked flawlessly.
Try using it for graphics!
Write in C.
If you've just spent nearly 30 hours
Debugging some assembly,
Soon you will be glad to
Write in C.
Write in C, write in C,
Write in C, yeah, write in C.
Only wimps use BASIC.
Write in C.
Write in C, write in C,
Write in C, oh, write in C.
Pascal won't quite cut it.
Write in C.
{
guitar solo
}
Write in C, write in C,
Write in C, yeah, write in C.
Don't even mention COBOL.
Write in C.
And when the screen is fuzzy,
And the editor is bugging me.
I'm sick of ones and zeros,
Write in C.
A thousand people sware that T.P.
Seven is the one for me.
I hate the word PROCEDURE,
Write in C.
Write in C, write in C,
Write in C, yeah, write in C.
PL1 is '80s,
Write in C.
Write in C, write in C,
Write in C, yeah, write in C.
The government loves ADA,
Write in C.
# by | 2009/02/19 11:09 | major | 트랙백 | 덧글(0)
# by | 2009/02/18 17:36 | Linux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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